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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니소스는 술의 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가장 안전한 설명이다.
그를 그렇게 부르면, 우리는 그가 건드리는
진짜 문제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디오니소스의 출생


“불 속에서 잉태되고, 신의 몸에서 다시 태어난 아이”
디오니소스의 어머니 세멜레는 테베의 공주였다
제우스는 인간 여인에게 자주 그랬듯,
세멜레에게 접근해 연인이 되었고
그녀는 곧 아이를 잉태하게 됐다
하지만 문제는 늘 그랬듯 헤라였다
노파로 변장한 헤라는 세멜레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그 남자가 정말 신들의 왕이라면
왜 늘 밤에만 오지?
왜 신의 모습은 한 번도 보여주지 않니?”
세멜레의 마음엔
의심과 자만, 그리고 치명적인 호기심이 생겨났다

세멜레는 제우스를 붙잡고 약속을 요구했다
“당신이 원하는 건 무엇이든 들어주겠다”
제우스는 스틱스 강에 맹세해 버려.
이 맹세는 신조차 거스를 수 없는 절대적 서약이었다
그리고 세멜레는 말했다
“당신의 진짜 모습으로 나에게 와 주세요.”
그 순간, 제우스는 최대한 약한 모습
으로 나타나려 했지만 신의 본질은 숨길 수 없었다
번개, 불꽃, 신의 광휘
이 모든 것이 동시에 터져 나왔고
인간인 세멜레는 그 자리에서 불타 죽는다
세멜레의 몸이 불타는 순간,
제우스는 그녀의 뱃속에서 아직 완성되지 않은
태아를 꺼낸다
그 아이가 바로 디오니소스.
이때 디오니소스는 완전한 신도 아니고
완전한 인간도 아닌 경계 상태의 존재였다
제우스는 아이를 살릴 방법을 고민하다가
자신의 허벅지에 태아를 봉합한다
허벅지는 생식력, 힘을 상징하는신체 부위였다
그곳에서 아이는 다시 성장했고
정해진 시간이 지나자 완전한 신으로 태어나게 된다

헤라의 질투

헤라는 그를 끝까지 증오했다
디오니소스는 단순한 혼외자가 아니라,
신과 인간의 경계를 무너뜨린 선례였기 때문이다
질서의 여신에게 그 존재 자체가 위협이었다.

헤라는 보통 질서·결혼·합법성의 여신이다
그래서 제우스의 외도를 벌하긴 하지만,
모든 자식에게 똑같이 집요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디오니소스만은 예외였다
“올림포스 편입의 위험성”
디오니소스는 결국 인간에서 태어나 올림포스 신이 됨
헤라에게 이건 “누구든 질서를 깨면 신이 될 수 있다”
는 선례를 남기는 것
그래서 단순 질투가 아니라 체계적 말살 대상이 된것

단순히 술의 신으로 볼 수 없는 디오니소스


죽음과 재탄생
디오니소스 신화엔 공통 구조가 있다
태어남, 파괴됨
몸이 해체됨, 다시 태어남
이건 농경 사회의 포도주 구조와 동일하다
포도는 짓이겨져야 발효를 거쳐 새로운 생명(술)이 됨
디오니소스는 포도 그 자체의 신격화이다

디오니소스의 제사에는 항상 찢김이 있다
동물은 산 채로 해체되고, 날고기가 나뉘어 먹힌다.
문명은 요리로 시작되는데, 그는 그것을 거부한다.
이는 잔혹함이 아니라 문명의 일시적 중단이다.
그 순간, 개인은 사라지고 집단만 남는다.
이름은 지워지고, 책임은 흐려진다.
인간은 이 상태를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갈망한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자아에서 벗어나는 황홀이 있기 때문이다.

고대의 디오니소스

아테네는 디오니소스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를 추방하지 않았다.
대신 극장 한가운데에 자리를 주었다.
비극은 디오니소스 제의의 안전장치였다.
무대 위에서 광기를 경험하고, 현실에서는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러나 이 균형은 오래가지 않았다.
서구 문명은 점점 아폴론적이 되었다.
이성, 합리성, 효율, 자기 통제.
광기는 배제되었고, 제사는 사라졌다.

디오니소스와 니체

19세기  니체는 이 균형이 깨졌다고 봤다.
니체의 진단은 서구 문명은 아폴론적으로만 치우쳤다.
이성, 질서, 도덕, 합리성 과잉의 결과로
삶의 생명력이 상실되었다.
그래서 니체는 선언해
“디오니소스를 다시 불러야 한다.”
니체에게 디오니소스란?
술의 신, 광기의 신이 아니라
“삶 그 자체를 긍정하는 힘”
고통을 제거하지 않는다.
모순을 해결하지 않는다. 그대로 껴안는다.
니체는 이 지점을 정확히 보았다.
문명은 너무 오래 디오니소스를 억눌렀고,
그 결과 삶의 생명력 자체가 말라버렸다고.
디오니소스적 긍정은 고통을 제거하지 않는다.

현대사회의 디오니소스

현대 사회에서 디오니소스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다른 얼굴로 돌아왔다.
정치에서는 군중의 열광으로,
전쟁에서는 축제 같은 파괴로,
예술에서는 창작자 자신의 해체로 나타난다.
정치적 광기 속에서 개인은 책임을 잃는다.
전쟁에서 인간은 번호가 된다.
예술가는 문을 열었지만, 닫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보며 묻는다.
왜 인간은 파괴를 미화하는가.
답은 잔인하게 단순하다.
인간은 파괴 그 자체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 속에서 ‘나’가 사라지는 순간을 사랑한다.
디오니소스는 폭력의 신이 아니다.
그는 자아 붕괴의 황홀이다.
그래서 그는 항상 위험했고,
그래서 그는 필요했다.
고대 사회는 그를 의례로 가두었다.
현대 사회는 그를 부정했다.
하지만 억압된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형태를 바꿔 돌아올 뿐이다.
이름 없는 디오니소스는
항상 가장 위험하다.


디오니소스 바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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